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가와 스구루 (문단 편집) == 공백의 1일 == || [[파일:external/cdn.mainichi.jp/013.jpg|width=100%]] || || 1978년 드래프트 당시. 좌측 2번째 [[한신 타이거스]](阪神)의 지명 종이에 적힌 것이 에가와.[br]우측 3번째의 [[요미우리 자이언츠]](讀賣)는 지명에서 혼자 제외되어 있다.[* 에가와의 오른쪽 옆 종이는 [[세이부 라이온즈]]의 1차 지명 선수를 적은 종이로, 종이에 적힌 인물은 2016년 시즌 도중부터 2018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즈]] 감독을 역임한 [[모리 시게카즈]]다.][* 왼쪽에서 여덟번째에 있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1차 지명 선수 종이에는 기다 이사무가 적혀있는데 요코하마, 히로시마, 한큐 등 3개 구단의 1순위 지명을 받았다. 추첨 결과 히로시마가 교섭권을 획득했지만 입단을 거부했고 다음 해 드래프트 재수를 통해 닛폰햄에 입단했다. 1980년 22승 8패 4세이브, 225탈삼진, 평균자책 2.28, 승률 7할3푼3리로 투수 부문의 타이틀을 독차지했으며 신인왕, 그리고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신인 선수가 최우수선수로 선정됐다. 2006년에 [[한국프로야구]]에서 신인왕-MVP 동시 수상자가 최초로 나오는데 바로 [[류현진]]이다.] || 당시의 드래프트는 구단과 지명된 선수 사이의 교섭지가 멀 경우에, 교섭을 위한 이동 도중의 기후나 교통 문제로 회의 참석과 진행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을 고려하여 모든 선수들에 대한 구단의 교섭권을 다음 해 드래프트 '''2일 전까지 유효'''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요미우리는 1978년 프로야구 드래프트 회의가 예정되어 있던 11월 22일의 2일 전인 11월 20일에 라이온즈의 에가와에 대한 교섭권이 소멸되자마자 곧바로 에가와가 귀국한 다음날인 11월 21일에 입단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이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 해 '''드래프트 규약이 바뀔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드래프트 지명 대상 선수는 일본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 중인 자''', 혹은 학교를 중퇴했거나 [[사회인야구]] 선수가 그 대상[* 이것도 [[1967년]]부터 변경된 것으로, 이전에는 [[일본]] 국적자만 드래프트 참여 대상으로 간주했으나 요미우리가 [[김일융]] 을 [[한국]] 국적의 [[재일교포]]라는 허점을 이용해 학교를 중퇴시키고 드래프트 번외로 영입하면서 규정이 바뀐 것.]으로, 당시 에가와는 대학 졸업 후 [[사회인야구]]에 진출하지 않고 [[미국]]으로 야구 유학을 떠났었기에 드래프트 지명 대상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드래프트 지명 대상의 범위가 너무 좁다고 판단한 [[일본야구기구]]는 1978년 7월 31일 드래프트의 대상 선수를 일본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 '''재학한 경험이 있는 자'''로 규정을 변경하여 에가와와 같은 야구 [[재수생]] 케이스도 드래프트 지명 범위에 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이 규정의 '''적용일은 다음 드래프트 회의 당일부터'''였고, 요미우리는 이에 따라 세이부의 지명권이 소멸한 11월 20일과 드래프트 회의일인 11월 22일 사이인 [[11월 21일]]에 에가와와 체결한 계약은 이전 규정에 따라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에가와의 입단을 강행했다. 이에 당시 [[센트럴리그]] 회장이었던 스즈키 류지는 이렇게 말장난하듯 규정의 헛점을 이용해 선수를 영입하는 것은 규칙을 제정하는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여 에가와와 요미우리의 계약을 '''무효'''로 간주했고, 이에 반발한 요미우리는 다음날 드래프트 회의에 불참하여 아예 그 해 신인선수 지명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요미우리는 드래프트 번외로 1980년대 불펜진의 핵심 일원이었던 카토리 요시타카 등 10명의 선수를 영입했다. 카토리 요시타카는 훗날 요미우리 투수코치로 재직하면서 [[정민태]], [[조성민]], [[정민철]] 등 한국인 투수들을 지도했는데 정민태를 싫어했고 정민철을 적극 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훗날 정민태가 [[스톡킹]]에 출연하여 카토리 코치를 맹비난했다.][* 원래는 2순위로 무려 [[오치아이 히로미츠]]를 지명하려고 했으나 요미우리가 드래프트에 불참하면서 [[롯데 오리온즈]]가 3순위로 오치아이를 지명했다. 이후 오치아이는 1994년 FA로 요미우리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에가와는 드래프트에서 한신에 1순위로 지명된다.[* 그래서 이 해 드래프트는 단 44명만 지명된 역대 최소 지명선수 드래프트란 기록을 갖고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아무도 지명하지 않았고, 당시 드래프트 규정(1975~1980)상 최대 4순위(4명)까지 지명이 가능하도록 되어있었기 때문.] 요미우리는 '''''이러면 우리는 독자 리그를 만들겠다!"'''는 주장까지 하며 격렬히 반대했지만, [[일본야구기구]]는 [[센트럴리그]]의 결정을 인정하여 드래프트의 효력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다만 일본야구기구는 일단 한신과 계약을 하고 요미우리로 에가와를 트레이드시키라는 입장이었고, 한신은 이에 반대하다 결국 에가와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코바야시 시게루]]를 맞트레이드하기로 결정한다.[* 이 트레이드로 한신에 건너간 고바야시는 22승을 거두고 [[사와무라상]]을 차지한다.] 이 사건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나옴에 따라 참의원까지 올라가서 관계자들이 해명해야 했으며, 일본 프로야구 드래프트의 주요 특징인 '''역지명 제도'''가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